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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음악

240618 관능소설 (김윤아)

by 빵굽는 타자기 2024. 6. 18.

김윤아 - 官能小說 (2024)

일단은 생각보다 텍스트가 적어서 놀랐다.

2001년작인 <Shadow of Your Smile>의 흐릿한 기억에 덧대어가며
음악과 함께 감상했다.

*

나는 우리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일 정도로 단조로운 가요계에서
자우림과 김윤아가 걸어온, 걸어가는 길을 늘 응원하는 입장이다.

내세울 거라고는 장발과 가죽 재킷, 사람들의 노래방 애창곡 락 발라드 몇곡뿐인 아저씨들이
TV에 나와서 락 스피릿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스스로를 희화화하는 꼴을 지켜보면서
우리 가요계에서 그래도 기타 리프 위주의 락큰롤 음악을 하면서
밴드를 지켜내면서, 묵묵히 자신들의 길을 걷는 팀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를 생각한다.

물론 김윤아라는 자우림 밴드의 프런트맨이 언제나 이상적인 결과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요계의 룰 속에서 영리하게 생존하면서
적어도 비굴하지 않게 자신의 밴드와 음악을 지켜냈다.
그 정도 위치만 사수해도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사람이었는데
밴드의 아홉 번째 앨범에 이르러 기어코 최고의 작품까지 탄생시킨다.
(2013년작인 <Goodbye, grief.>는 단연 자우림의 최고작이다)

분명 당신은 이 나라가 아닌 곳에서 태어나서 더 커다란 락큰롤의 별이 되었어야만 합니다.

*

뮤지션으로서 그녀는 그런 존재다. 뭐, 그건 그렇고. 이제는 책 이야기를 해보자.

좋은 작사가인 뮤지션들은 쉽게 좋은 작가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다.
전설적인 패티 스미스나, 뉴욕 타임즈에 기고하던 시절의 보노 정도를 제외하면.
내가 가장 사랑했던 밴드 중 하나인 '언니네 이발관'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기억하면서
이제는 제발 뮤지션들이 글 쓰겠다는 욕심 좀 안 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2001년 솔로 1집 앨범에 동봉된 에세이집은 싸이월드 감성으로 가득했다.
격양되어 있고, 낯설고 화려한 단어들로 그 격양된 감정을 포장하려 했다.
내가 지금처럼 자우림의 커리어를 존경하고 있는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아직은 세상 보는 눈이 어린, 글은 잘 쓰지 못하는데 잘 쓰는 척 하는 힙스터,
앞으로는 책 내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좋은 음악만 만들어 주기를. 정도로 결론을 냈었다.

시간이 흘러서 드는 재밌는 생각은,
과연 그때 당시의 나는 어땠는가 하는 의문이다.
나도 똑같지 않았나? 뭔가 세상을 향해서 엉뚱한 소리를 하고 싶은 반항아.
어쩌면 스무살 시절 같은 시간을 지나온 우리 세대 전체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용기는 부족하고,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누군가 나 좀 봐줬으면 좋겠고. 그런 것들.

2024년 그녀의 글을 다시 읽는다.
에세이라기 보다는 시집의 형태에 가깝다.
그녀는 사랑과 죽음, 믿음, 그리움, 이별 등의 소재를 가지고
낯선 도시의 감성에 담아서 짧은 글들을 썼다.
그녀가 헛되이 삶을 살아오지 않은 것처럼
어린 시절의 과잉은 사라지고, 불필요한 수식어들도 모두 덜어냈다.

어쩌면 밴드와 그 밴드를 상징하는 멋진 프런트맨에 대한 존경심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야 어른의 글을 읽은 것 같다.

*

하루 전에 백건우 씨가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들을 담아
CD 패키지 안에 담은 <고예스카스> 앨범을 감상해서 그런지 몰라도
(백건우 씨는 물론 좋은 연주자지만, 직접 찍은 사진은 좀...)
관능소설 속의 사진들은 정말 아름답다. 이승재 작가의 기록이라고 한다.

음악에 대해서는 감상 전부터 너무 과잉되어있다는 주위의 평을 들었는데
나는 그녀가 발매한 다섯 장의 솔로 앨범들 중에서
가장 세련되게 절제한 사운드라는 인상을 받았다.
특별히 바이올린리스트 사이토 네코가 참여한 <체취>와 <장밋빛 인생>을
최고의 트랙들로 꼽고 싶다.

사실 가장 기대한 건 이승열과의 듀엣곡 <U>였는데
결과적으로는 가장 실망한 트랙이 되고 말았다. 뜬금없이 이물질이 끼어있는 느낌...

자우림 - 영원한 사랑 (2021)

사 놓고 몇번 감상하지 못한 자우림의 열한번째 앨범도 재감상.
트랙들의 완성도는 그들의 최고 작품인 9집과 10집 못지 않은데
이걸 업템포 곡들을 앞부분에, 느린곡들을 뒷부분에 몰아놔서
한번에 완주하기가 좀 힘겹다. 그래서 잘 안 듣게 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