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권이 인생의 서로 다른 시기를 조명하리란 예상과 달리 1권과 2권은 주인공들의 성장기를 다루며 비교적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2권은 특정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두 주인공 인생의 전환점을 디테일하게 묘사했다.
3권에 들어서야 이 이야기는 호흡방식에 변화를 준다. 1권 첫머리에 잠시 나왔던 현재의 레누가 등장하고, 릴라의 운명이 최종적으로는 어떻게 마침표를 찍었는지 밝혀버린다. 이제 이야기는 다시 2권에서 마지막 만남 이후로 돌아간다. 두 주인공이 다시 만나기 전까지 지나쳐버린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서 소설의 시점이 잠시 릴라로 변경되는데, 이 부분이 썩 매끄럽진 않다. 4권까지 기대대로 훌륭하게 마무리된다면 아마도 유일하게 실망스러웠던 챕터로 기억될 것이다.
3권은 전체적으로 앞선 이야기에서는 서술자이면서도 릴라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레누를 조명한다. 한 권의 책으로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결혼과 두 아이의 출산을 겪으며 엘레나 그레코는 나이를 먹어간다. 그동안은 릴라와, 릴라와 얽힌 니노만이 그녀의 삶을 움직이는 장치들이었다면 이제는 더 많은 인물들과 혼란에 빠진 세상이 그녀의 삶을 흔든다. 그리고 여전히 릴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권은 철없는 소년 소녀들이 폭력에 함몰되어 길을 잃고도 성장을 위해 발버둥치는 전개였다면, 2권은 그 중에서도 특별한 두 명 주인공이 성인의 문턱을 넘는 위태로운 장면을 묘사했고, 3권에서는 마침내 현실, 사회, 정치, 이념, 계층, 성별, 가정, 불륜, 육아와 같은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던 '진짜 세상'이 깊숙하게 관여하기 시작한다.
우정.
이 이야기는 흔히 두 주인공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고 설명된다. 하지만 과연 우정일까? 나는 우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정은 빛나는 개념이다. 물론 어린 시절 우정이라고 여겼던 어떤 종류의 관계들은 불행하게 끝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은 우정이 아닌 어떤 관계성을 우리가 그저 우정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 뿐이다. 살아남는 우정에는 그림자가 없다. 오로지 빛 뿐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떨까? 사랑은 아름답기만하진 않다. 때로 어둡고, 아프고, 진절머리가 난다. 때로 살인충동을 동반하기까지 한다. 레누와 릴라의 관계가 그러하다. 릴라는 3권의 마지막까지 단 한 순간도 레누를 우정으로 대하지 않았다. 레누는 그 모든 의혹들과 릴라가 준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저 자신의 진심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인다. 3권의 하이라이트는 폭력 사건 뉴스를 보고 레누가 그 배후로 릴라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남편을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과 나아가 니노까지 또다시 릴라의 것이 되고 말것이라는 두려움은 이 이야기를 아예 긴박감 넘치는 애증의 사이코 드라마로 바꿔버린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집착이다. 올드한 표현이긴 하지만... 1권에서 수없이 많은 등장인물들 이름에 익숙해지기 전에 무슨 일만 있으면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가는 이탈리아의 소년들을 보고 삼국지의 장수들을 떠올렸었다. 2권의 중심 사건은 그냥 우리나라의 아침드라마 수준이 아니라 남미 소프오페라 수준의 대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요란한 재미를 선사했다. 3권은 사이코 드라마다. 엘레나 페란테는 각권에서 요란하게 장르를 넘나들며 재미를 선사하고, 사랑의 다면성에 대한 그림을 천천히 완성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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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훌륭한 문학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문학은 개인을 그리며, 훌륭한 문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상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단 한 순간도 작가가 글을 쓰는 방식에 실망하지 않았다. 내가 실망한 건 정치와 여성이라는 소재를 주목한 출판사와 번역가가 이 엄청난 소설을 그저 정치의 도구인 것처럼 의도한다는 점이다. 그런 방식으로 책 파는 건 이제 좀 지겹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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