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부터 단편문학의 정수라 할만한 문장들을 읽어왔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 문학은 내게 익숙하지 않은 분야지만, 얼굴 없는 작가분의 나폴리 4부작 제 1권을 펼쳐들면서도 꽤나 회화적 아름다움을 상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눈부신 친구>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강렬한 빛을 비추어, 나의 눈을 눈부시게 했으니...
이 이야기는 라파엘라 세룰로(리나/ 릴라)와 엘레나 그레코(레누/ 레누차), 친구인 두 사람의 성장을 담고 있다. 그다지 신선하지 않은 구도로 평범한 레누가 서술자가 되어, 종잡을 수 없이 특별한 릴라를 바라보는 것으로 함께 성장해 나간다. 문장들은 장황하지 않고, 조금은 불친절하다 싶을 정도로 심플하게 감정의 테두리 정도만 묘사하는 것으로 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낸다. 독자는 이탈리아 소녀, 소년들의 폭력적인 세상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마구 얻어맞게 된다. 대체 이건 뉘집 딸내미여? 뉘집 아들내미여? 싶어서 자꾸 서두 인물표를 확인해 가면서 말이다. 러시아 대하 소설을 읽던 때와 비슷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탈리아 이름은 러시아쪽 보다는 쉬운 편. 그렇게 두 소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인물이 많고 장면 묘사보다 일대기적 정리가 중점이 되다 보니까 삼국지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실제로 걸핏하면 몽둥이 찾는 소년들이 전쟁터 나서는 장수들 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감정적으로 이 책이 어떤 경험이 되어 남을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결국에는 이것이 타고난 이야기꾼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에는 좋은 문장을 쓰는 작가가 있고, 재밌는 이야기를 쓰는 이야기꾼이 있다. 문장도 좋고, 이야기도 기가 막힌... 둘 다 좋으면 바랄 게 없겠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순수 문학 한정으로 일단 좋은 작품이라는 게 증명된 경우에는 문장 생산가인 경우가 훨씬 많다. 분명 9:1 이상의 확률일 것이다. 이야기 꾼들은 자기 이야기를 최대한 크고 극도로 복잡하게 만들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대부분 장르 소설 분야로 나아가게 되니까. (문학의 역사에서 개인적으로 꼽는 최고의 이야기꾼은 찰스 디킨스다)
그래서 생각보다 이야기꾼의 순수 소설은 귀하다. 나도 참 오랜만에 제대로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꾼의 소설을 읽은 것 같다. 변해가는 릴라의 모습과, 그녀를 바라보는 레누의 시선은 타고난 이야기꾼이 아니라면 이처럼 눈부시게 그려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눈이 부신'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난 아직 1권만을 읽은 것 뿐이니. 또 다른 이야기는 2권 감상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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