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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음악

Dear Paul

by 빵굽는 타자기 2024. 6. 1.

5월 한달 동안 당신의 책들만 읽었습니다.
막 스무살이 되기 직전에 처음 당신의 책을 접했고
그 뒤로 26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흘러버렸군요.

좋아했던 뮤지션들을 떠나보내는 건 이제 익숙한 일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작가를 떠나보내는 건, 여전히 실감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낯선 일입니다. 

몇년전에 당신의 건강과 관련된 뉴스를 접했고, 걱정도 되었지만
올초에 <4 3 2 1>을 읽고 다음 작품을 기대하며 한참 들떠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당신과 같은 날카로운 기록자가 남긴 기록들에 의해서 흘러간다는 
팬으로서의 자부심도 꽤 높아진 상태였죠.

5월 한달 동안 당신의 책들을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마냥 슬픔 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뭐랄까, 한참 포장도로를 달리다가
이제 막 비포장 도로에 들어서는 것 같았습니다.

소설은 이 시대에 받는 푸대접에 비해서 훨씬 커다란 세상이어야 합니다.
단지 하나의 좋은 작품을 찾아 읽고 느끼게 되는 충만함으로 끝나서는 안 되죠.
세상이 자꾸만 어두워지기에, 우리는 등대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당신이 말했듯 소설처럼 좋은 영화들도 있지만,
여전히 제게는 소설만이 세상의 등대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제 삶에서 가장 밝게 빛을 내던 등대였습니다.

40대 중반이 되었지만
저는 여전히 <달의 궁전> 네온 사인을 찾아 헤매고 있는 성숙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세상에 남긴 책들이 여전히 제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그것이 친구 같은 작가를 잃은 상황에서도 소설이 주는 힘입니다.
TIMELESS란 소설의 의미는 그 무엇보다 거대합니다.
당신의 책은 여전히 세상을 밝히고, 저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저는 등대를 잃은 것이 아니고, 길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해마다 5월이 되면 조금 쓸쓸해지기는 하겠지요.

이제 이렇게 작별 인사를 건네겠습니다.
아홉 개의 행성, 아홉 번의 삶, 아홉 번의 이닝
결국에는 모든 것이 연결되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당신을 만나서 딱 한마디만 건넬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5월 31일,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