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역사학자들이 번역한 <지중해>에 빠져있다가 문학가에 의해 다듬어진 문장들을 읽는 상쾌함!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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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가을, 제주도의 만춘서점에서 구입한 책. 앞으로 다가올 적절한 여름의 끝자락에 읽어야지, 하고 아껴두었던 책.
마쓰이에 마사시. 처음 만나는 작가.
평소처럼 작가에 관한 사전 정보 없이 책을 읽었다. 건축가가 아니라는 것도 놀라웠고, 생각보다 많은 나이 때문에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불륜이 쓸데없이 아름답게 묘사된다던가 하는 거..
아름다운 디자인 때문에 화제가 된 책이고 내부도 꽤 아름다운 묘사들로 채워져 있지만, 소설로 완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답을 하지 못하겠다.
가장 인상적인 건, 등장인물들이 마치 하나의 건물이 계획되고, 실제로 건축에 이르는 것처럼 묘사들이 천천히 겹쳐 쌓여가면서 형상화된다는 것이었다. 일상의 행동들만으로 주인공 곁을 떠돌던 인물의 미소가 소설 중반쯤에 드러나는 건 꽤나 인상적인 장치였다. 주변인물들 뿐 아니라 주인공의 묘사도 꽤나 느릿하지만,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쌓여 나간다.
하지만 이 인상적인 캐릭터 구축은 오로지 건축사무소 구성원들에 한정될 뿐이고 외부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무책임하다. 특히 '이 인물은 절대적으로 선한 인물이니, 지금부터 이 인물의 행동과 대사는 무조건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던져놓는 소수의 사무소 밖 캐릭터들이 흐름을 흐트러뜨린다. 현실에 닿을 뻔 했던 이야기는 동화로 변질된다.
소설이 좋은 건축물과 닮아 있다는 걸 보여줬다. 나는 이런 식으로 스페셜리스트의 작업을 깊은 곳까지 느리고 강하게 파고드는, 마치 사전과 같이 과하다고 느낄 정도로 파헤치는 집념이 있는 소설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결국 소설은 소설이다. 흐트러짐 없이 구축된 캐릭터에 균열이 생기는 것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독자의 마음이 움직인다. 장작은 잘 쌓았다. 그렇다면 불을 붙여야지만 그것이 '이야기'가 된다.
이 소설은 하나의 건축물이 별 위기 없이 완성되는 것으로 끝난다. 나름의 부침은 있지만, 소설적으로 독자를 흔드는 수준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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