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책과 음악 '24

종이 동물원 (켄 리우)

빵굽는 타자기 2024. 9. 30. 01:03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모두 앞으로의 내용이 더 흥미로울 장편의 서장 같다는 느낌을 준다.

켄 리우를 읽는 건 처음이다. 당신은 단거리 주자가 아니라 장거리 선수다. 소설가라기보다는 소설가를 꿈꾸는 세계관 디자이너 같은 작가다. 켄 리우의 장편은 꼭 읽어보고 싶어졌다. 

SF 단편은 만만치 않은 장르다. 짧은 분량안에 소설적 완성도와 배경 설명이 모두 이루어져야하므로.

서로 다른 시간대, 서로 다른 인물, 현재와 기록, 다양한 경우의 수. 그 짧은 분량안에서 진득하게 전개를 해 나가는 대신 교차와 배열로 범벅을 해 놓은 작품들은 촌스럽기까지 하다. 이야기가 맘대로 떠돌다가 마지막에 만인의 가불기인 어머니의 편지를 붙여놓는다고 독자 모두가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니다.

<즐거운 사냥을 하길>이 영상화 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오로지 올리버 토마스 연출자의 공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수록된 단편들 중에서는 비교적 스트레이트하고 소설적인 리듬감이 느껴지는 <송사와 원숭이 왕>을 최고작으로 꼽겠다.

분량이 중편에 이르는 <레귤러>와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도 주목할만 했다. 확실히 이야기가 길어지니 좋은 느낌을 준다. <레귤러>는 이야기가 너무 단순하고, 거울 같은 단서가 얄팍해서 힘을 잃지만 격투 장면의 묘사가 오랜만에 터프한 SF의 매력을 느끼게 해 줬고 <역사에...> 이야기는 장르를 뛰어넘은 진중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한국인이라면 더욱이 진지해질수밖에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