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III 사건, 정치, 인간 (페르낭 브로델)
내 상상은 에어컨 바람과 수박, 가득 쌓인 만화책 풍경에서 시작된다. 해마다 장마가 끝나고, 맨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고온다습의 계절이 오면 평소에 쉽게 손이 가지 않던 장대한 분량의 책들을 잔뜩 쌓아두고 독파해 나가는 것으로 무더위를 이겨내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뭐, 제대로 실행에 옮긴 해가 많지는 않다. 올해 무더위는 전설적인 수준이었고 단촐히 <지중해> 네 권만을 쌓아두고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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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연속성'을 중요시하는 저자의 신념이 특정 연대의 사건만을 드라마틱하게 포장하는 다른 역사서와는 확연히 다른 개성을 느끼게 한다. 나는 지중해를 누비는 뱃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바닷바람을 느끼고 싶었을 뿐인데 지중해에 이르기 위해 저자는 유렵 전역, 아프리카, 아시아 일부를 무대로 시간적 배경도 전후로 최대치까지 확장하며 모든 역사는 당대의 시간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가운데 개념으로 파악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지형과 기후로부터, 종교와 전쟁, 지배자들과 돈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당시의 세계를 형상화해 나간다. 정작 타이틀인 펠리페 2세 시대를 설명하는데 이르러서는 힘이 좀 빠지는 느낌까지 든다. 아무래도 논문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가설의 입증에 힘을 주고 사건의 진행은 주제 제시에만 그친다. 나 같은 일반 독자가 읽는 재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
부수적으로, 많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두명의 역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문장을 엮는 것도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요소다. 온도는 비슷하게 맞췄지만, 맛이 다르달까.
아무튼 덕분에, 당대의 환경적, 지리적, 사회적 지식은 부족함 없이 쌓였다. 출항은 이제부터 나의 상상 속 영역인가? 싶었을 때 겨우 여름이 잦아들고 있었다.
여느 해보다도 긴 여름이었다.
윤하가 소년 같은 중저음으로 읊조릴때면 마음이 늘 두근거렸다. 새 앨범에 대한 기대도 컸다. 사운드는 부족함이 없는데 아쉬운 부분은 가사다. 나는 주로 사운드 위주로만 음악을 감상하기 때문에 가사는 거슬리지만 않으면 OK다. 그 동안 내 귀를 거슬리지 않았던 노래가사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잘 쓰인 가사였는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싱어 본인이 전곡의 작사를 맡은 이번 앨범은 음악적 흐름을 거스를 정도로 '우주적' 내용에 집착한 단어 선택이 귀를 거스른다. 한 곡도 아니라 앨범 전체가 그렇다. 정말 힘들었다..
송라이팅에 참여하는 게 아티스트의 가치를 높이는 수단이고 작곡보다는 작사가 쉬워 보이는 것도 당연하니 이해는 가는데 소설은 소설가에게, 드라마는 드라마작가에게, 작사는 작사가에게.. 부디.